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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간 동안의 말씀


월(7/30): 창세기 32: 22-31,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강 건너로 보내어 놓고도 자신은 건너지 못한 채 홀로 남아 있는 야곱, 사실 삶에 대한 두려움은 미래로부터 온다기 보다 과거로부터 주어지는 것들이 더 많다. 과거에 내가 행한 잘못들이 청산되지 않았을 때, 그리고 회개 즉 그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돌이키지 못했을 때 현재를 사는 것도, 미래를 직면하는 것도 두려움이 아닐 수 없다. 현재는 이미 들어와 있고 미래는 어짜피 잘 모르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창조와 섭리 구속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그런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찾아오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그분과의 밤을 꼬박 새는 씨름은 자신의 변화의 기회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변화를 위해서 그의 정체성을 추구하도록 한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후로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하라” 사람의 변화는 정체성의 변화에서 시작한다.

화(7/31): 시편 17: 1-7, 15, 다윗은 자신의 죄를 알지만 또한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 그분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의지하여 그는 하나님께 담대하게 기도한다. 더 이상 속임의 말이 아니니 기도를 들어달라고 간청한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깰 때를 언급한 것은 그만큼 그가 기도에 몰입했었음을 암시한다.

수(8/1): 이사야 55:1-5,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항상 그분의 언약으로 말미암은 은혜와 사랑 안에 거한다. 이 사실을 모르면 자신의 내면의 허전함으로 인하여 외부 환경에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건다. 거기서 힘들어 노동하고 돈을 벌며 그리고 자신의 외적인 삶의 충족을 위하여 그 돈들을 탕진하지만 언제나 만족은 없다. 곁에 사람들을 따라 어느새 허영을 쫓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런 우리를 너무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모두를 그분 곁으로 초청한다. 살기 위하여 내게로 와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으라는 부르심이다. 그분의 말씀 속에 인간이 살고 또한 풍성해질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번영은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번영과 같은 것이다.

목(8/2): 시편 145:8-9, 15-21,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육신적인 자만과 완고함, 그리고 이미 그들 가운데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일로 인하여 크게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6절에서 바울은 육신적으로 난 이스라엘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 의하면 참된 이스라엘은 육체적 출생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언약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하지만 육신적인 이스라엘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그들만의 메시아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벌써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만족하고 그분의 말씀과 성령을 떠나 사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는가?

금(8/3): 로마서 9:1-5, 육신의 소욕에 우리 자신을 넘겨주면 죄의 종이 되고 맙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신 주님께 우리 자신을 넘겨드리면 영원한 생명 속에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까요? 죄의 노예, 아니면 사랑과 은혜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토(8/4): 마태복음 14: 13-21,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이 소개되고 있다. 이는 기적을 행하시는 단순한 예수님의 능력과 멋을 알리는 기사가 아니다. 그분이 베푼신 기적은 순전히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그분의 사랑에서 나온 사건이다. 배고픈 무리들의 실상을 헤아리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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